: Ⓒ Norman Copenhagen
때로는 퍼플, 때로는 바이올렛. 간혹 자주색과 담자색, 때로는 라일락과 라벤더의 색, 가끔은 마젠타. 각기 다른 색을 칭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보라’다. 여느 색이 그렇듯, 보라색은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강수지는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라며 보라의 산뜻함을 얘기했다. “핫핑크보다 진한 보라색을 더 좋아해.”라고 노래한 아이유도 있다. 그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뜻을 담은 보라, Objet를 통해 보라의 의미를 살펴보라.
: Ⓒ 2015 Maison Objet
타르수스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왕실의 바지선, 금장식으로 화려하게 반짝이며, 거대한 돛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를 호령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배였다. 보라는 왕족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근대 이전에는 보라색 염료를 만들어내는 비용이 무척 비쌌기 때문이다. 염료인 티리언퍼플 1그램을 생산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을 살펴보자. 우선 바다달팽이 1만 2천 마리가 필요했다. 달팽이를 으깨 분비선을 노출, 분비선에서 나오는 액체를 받아 양털을 태운 재와 오줌을 섞어 열흘 동안 발효해야 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도 순수한 보라색 염료를 얻기란 무척 어려웠다. 바다달팽이의 종에 따라 분홍색이나 파란색이 나오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이다.
: Ⓒ Norman Copenhagen
그렇다면 보라색은 어떻게 대중화될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1956년 왕립화학대학 화학도였던 윌리엄 헨리 퍼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런던은 석탄 가스를 사용하는 가로등을 설치하고 있었다. 석탄 타르는 가스 생산 과정의 부산물로 풍부히 공급되었고, 그는 그 가운데 탄화수소가 말라리아 치료제로 쓰일 수 있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는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나 석탄 아닐린과 크롬산을 섞었을 때, 그는 그
곳에서 자주색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용액은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색을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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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rman Copenhagen
보라색이 문화에서 특정한 무언가를 상징하게 되었다고 여겨진 시기는 ‘서프러제트’ 무렵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 유럽에 불었던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운동가들은 보라색을 자신의 상징 삼아 투쟁을 시작했다. 서프러제트는 최근 캐리 멀리건, 메릴 스트립, 헬레나 본햄 카터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서프러제트의 영향일까. 현재에도 보라색은 페미니즘의 상징색 중 하나로 여겨진다.
Ⓒ Kartell
1967년 ‘사랑의 여름’ 역시 보라색이 지금의 이미지를 얻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등장 이후, 샌프란시스코 헤이트-애쉬베리 교차로 부근에 결집한 사람들은 소위 ‘히피 혁명’을 일으켰다. 머리에 보랏빛 꽃을 꽂고, 보랏빛 사인을 들고, 보랏빛 옷을 입은 이들이 거리로 뛰어 나왔다. 패션 산업은 이를 제일 잘 캐치했다. 60년대 말, 보라색 의류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 Ⓒ Norman Copenhagen
보라색이 ‘저항의 상징’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보라색 빗속에서의 저항(the Purple Rain Protest)’이었다. 인종분리정책을 펼쳤던 정부는 자신들의 뜻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가려내 처벌하기 위해 보라색 염료를 집어 넣은 물대포를 분사했다. 보라색으로 물든 사람들은 재판도 없는 체포와 구금 대상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물대포의 방향을 여당의 당사 쪽으로 돌려 놓았고 보라색 비는 당사 건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라색 국민의 힘을 인정하라.’는 요구는 그 이후 빗발처럼 거세지기 시작했다.
보라색은 이밖에도 다양한 문화권에서 많은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다. ‘보라스럽다(So Purple)’는 말은 스페인 문화권에서는 와인과 음식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사람을 뜻한다. 때로는 분노(Purple Rage)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화난 사람의 얼굴 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역사 속 보라색의 기원과다양한 의미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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